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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시인 / 이어령

장혜진 좋은글
0 103 2024.06.12 15:02

여름의 시인 / 이어령

여름의 태양은

물만 증발시키지는 않는다

딸기처럼 붉게 익어 터지는

7월의 태양 밑에서는

모든 것이 대기로 바뀐다

도시는 잘못찍은 노출과다의 사진처럼

윤곽선을 잃고 인화지만 반짝인다

사막의 신기루 같다

보지 않았는가?

정오의 시가지를

아스팔트 길이 돌연히 일어서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것을

태양이 정수리로 꽂힐 때

수풀들이 그림자를 잃고 팽창한 해러슈트처럼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여름은 바다를 일어서게 한다

파도에 더 많은 부력을 주어

해안선은 높아지고

해변가 천막들은 뭉게구름처럼 부푼다

언어에 빛과 열을 가하면

여름의 도시와 바다가 된다

굳어 있던 이념들은

원색의 비치파라솔처럼 퍼지고

누워 있던 일상의 언어들은 일어나

해일을 일으킨다

중력에서 벗어난 사물들은

완강한 땅의 경계선에서 풀려나고

웹스터 사전 속에 정리된 얌전한 말들은

비등점을 넘어 한국말이 되고 중국말이 되고

한번도 듣지 못한 스와힐리어로 변신한다

슬픔, 외로움, 죽음 - 검은 테 두른 낱말들에

빛의 뜨거운 여름 손가락이 닿으면

신속하게 눈물의 습기가 말라

여름 시인들은

강철까지도 구름으로 만든다

태양의 인력이 가장 커지는 여름

보지 않았는가!

나무와 돌멩이와 짐승과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하늘로 추락해가는 것을

날이 지날수록 검게 타는 시인들의 근육이

아틀라스처럼 땅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을

바다를 수직으로 일으켜 세우는

여름 태양의 위력을 보지 않았는가



 - 이어령 시집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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