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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으로 얻은 깨달음은 이만권의 책에서 얻은 지식보다 값진 것이다.

정유진
0 2,500 2017.08.2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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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으로 얻은 깨달음은 이만권의 책에서 얻은 지식보다 값진 것이다.

 

원효대사가 젊어 불교에 입문해 많은 노력끝에 깨달음이 부족하다 느껴 결국 먼저 불경을 해독한 중국의 대사들을 친견하려 가는 길에 지쳐 쓰러져 산속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잠결에 물을 찾던 중

 

 바가지에 물이 있는 것을 찾아 허급지급  맛있게 목을 적시고 새벽 동이 터 정신을 차려보니 그 바가지가 사람의 해골이라 깜짝 놀라 생각하니 그 물이 해골바가지 속의 물인 줄  알고 먹었다면 그렇게 

맛있게 먹었을 수가 있었겠는가?를 깨닫고 

 

세상사 모든 것이 마음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중국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깨달음으로 다시 신라로 귀국하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남긴 얘기는 동화같이 듣던 얘기이다.

 

곧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깨우침이었다.

 

그 뒤 팔만대장경을 접고 만행의 길을 떠돌면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의 깨달음을 전하며 한 세월을 보내다 열반한 원효대사의 가르침은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침을주었으며

 그는 금강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집을 남겨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 중국의 한 학자는 책을 이만권을 읽고 지식을 수없이 머리에 담아 설(說)하고 다녔는데 사람들은 그를 이씨라 해서 이만권이란 별명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정작 깨우침보다는 남의 지식만 설하고 다녔기에 남의 공감을 사지 못했다는 전설같은 인물이 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앞으로 어떤 일에도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고자 공부하는 것이지 남의 지식을 배워서 앵무새처럼 유식(有識)함을 뽐내기 위함이 아니다.

 

몇천년전의 성자(聖子)들은 책이나 스승님께 배워서 깨달음이 온 것이 아니라 다들 자기 성찰(省察)의 명상으로 깨우침을 득(得)도(道)하며 설한 내용들을 진리라 여기며 종교화되어 신앙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이란 그 성자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는 말이다.

그 말들의 진언이 그대로 전해져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 오는 것이다.

 

그러면 현시대나 지난 몇천몇백년의 과정에 많은 깨친자들은 왜 기록이나 제자가 없었는지는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자의 말씀은 참고서이고 나의 성찰(省察)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깨우침이 없는 배움은 잘못 남의 지식으로 지식인 행세만하는 교만한 자가 되기 십상이다.

 

곧 나의 명상이나 묵상이 깨침을 얻어야 곧 나의 것이 되고 남에게 도움되는 지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한 낮 경줄이나 바이불을 외워 목자 행세나 한다고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터득(攄得)한 스스로의 진언을 얘기해야 바른 말을 하는 것이다.

 

중국의 이만권과 원효를 비교하면 당장 알것이다.

 

내가 학생이든 회사원이든 사업가든 설령 교육자라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깨침을 가지고 있어야지 남의 지식만 달달외워 존경받으려는 것은 남의 말을 팔아 먹고사는 뚜쟁이에 불과하다.

 

그래서 명상의 화두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종교하고도 별개의 문제이다.

무엇을 만들거나 무엇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자기성찰(省察)이 시작이고 마지막단계이다.

 

그래야 교육자는 스승으로 남고 사업가는 창조경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 어떤 일을 하든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지식인이나 교수들의 논문표절등은 자기성찰없이 학위를 따려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제일 불쌍한 자가 자기성찰없이 부자가 되거나 고관대작벼슬을 하면서 일생을 헛으로 호의호식하는 자들이다.

 

차라리 가난에 찌들어도 자기스스로 고민하며 인생의 고뇌를 알면서 생의 가치, 즉 존재이유를 아는 자가 훨씬 값진 인생이다.

 

본시 죄란 길(道)두고 딴 길을 갈 때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의 원천이다.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도움을 바라는 자체가 바로 죄의 시작이다.

 

또한 남에게 도움이 안될 때 세상을 떠나는 것이 도(道)이다.

백세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말씀처럼 몇살 까지 살고 싶으냐?고 묻는

 질문에 남의 신세를 안질 때까지 그리고 남에게 도움이 될 때까지라고 답한 내용은 교수의 말씀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자의 진언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나역시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명상으로 자기 성찰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 보물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많은 재물을 유산으로 남길 것이 아니라 나의 성찰에서 얻은 깨침을 정신으로 남겨야 하는 것이다.

 

나의 비명(碑銘)에 재산을 얼마남기고 갔다고 쓰고 싶은가?

옛날처럼

아니면 어떤 벼슬을 하고 갔다고 쓸 것인가?

 

실재는 비명도 무덤도 죽어서는 필요없는 얘기다.

꼭 쓰고 싶은 비명이 있으면 나의 정신을 두고 간다라고 쓰고 싶다.

 

그 내용은 나의 깊은 명상의 성찰에 달려 있다.

무슨 말이 필요없는 깨침을 가지고 후손에 전해야 올바른 유산이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본디 없던 것이 태어나 다시 없어지는 것이니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꼭 있다고 고집한다면 지금 쓰고 있는 말을 남기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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