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독단적인 행동에 대한 당시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불신으로 인해, 한국 전쟁 후 미국에서 매카시스트 즉, 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 추종자로 낙인찍힌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정규군(중국인민해방군)의 개입을 무시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에 수십 개 사단급 병력을 보내어 개입하자 만주에 원자폭탄 투하와 장제스 총통 지휘하의중화민국 국군의 지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맥아더는 "공산주의의 뿌리를 뽑겠다"는 게 목표였던 반면, 트루먼은 정치가인지라 "제한전쟁"으로써 전쟁은 시작된 곳에서 맺어야 하고, 얼른 전쟁을 종결지어야 정치적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의견차로 결국 맥아더는 해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중공군의 참전 이후, 맥아더는 보급/충원의 근거지가 되는 만주에 항공폭격을 허가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소련에 참전빌미를 줘 확전되는 것을 우려하여 불허했다. 중공군 참전 이전에 중화민국을 연합군에 편입시키지 않은 것도 중공에 대한 자극을 피해보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 정부로서는, 소련의 힘과 의지를 과대평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 실수와 2차대 전 종전 직후 대다수의 부대를 해체하여 동원가능병력이 극히 줄어든 것이 확전을 피하려 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기미를 눈치챈 소련은 비공식적으로 공군조종사를 중국에 보내 한-만국경에서 미군 폭격기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미국 국내에서 인기 없는 전쟁이었다. 기간이 길어지자 여론의 종전압력도 커졌다. 이로 인해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